3대의 공덕

“아, 그니까, 잘 맞췄어야지. 그게 능력이야”
거의 숯덩이가 된 삼겹살 몇 조각이 불판 끝에 자빠져 있을 무렵 선배는 나에게 마지막 남은 쏘주를 따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. 지금까지 나를 물먹인 부사장의 욕을 같이 하면서 괜찮고 또 기회가 있을 거라는 따뜻한 위로의 말을 했는데, 갑자기 샤워기의 찬물을 맞은 것 같았다.

“그러게요, 그게…저는 잘 안되더라구요.”
쏘주를 한 입에 들이부었다. 쏘주가 물 같았다.



손만 조금 뻗치면 임원이 될만한 자리에서 다시 내려오게 된 나는 또 다시 절망했다. 친한 동료, 퇴임 임원, 선배와 몇번의 위로성 술자리를 가졌지만 다음 날 술 깨고 나면 똑같이 우울했다. 그렇게 나의 좌절감은 고질적 관절염처럼 내 마음속에서 몇 년간 있었다.

 


여자에게 남편 복이라면 직장에서 상사복은 그 사람의 직장 생활을 좌우 한다. 잘 맞는 상사 만나서 승승장구 하거나, 안 맞는 상사 만나서 매일 매일을 괴로워 하다가 결국 퇴사하는 등 다양한 사례를 봤다.

L팀장 : 회사 구조 조정으로 어쩔 수 없이 계열사로 옮겼고, 2년 뒤 새로 온 사업부장 전무가 알고 보니 동향, 형의 친구. 얼마 뒤 임원으로 승진

H그룹장 : 학창시절 공부 잘했고, 반도체 관련 석사 취득하고 국내 유명한 반도체 회사에서 근무. 성실하고 일 잘하기로 소문났지만 새로온 상사와 갈등이 있어 버티다가 결국 퇴사. 현재 학원 운영

K담당 : 실력도 있고 인품도 좋았지만 새로 온 CEO와 코드가 안 맞았다. 면 담당되고 한직으로 밀려난 후 그 해 겨울 퇴임


상사는 자신이 선택할 수 없다. 하늘이 정해준 대로 그냥 만나게 된다. 좋은 상사를 만나는 것은 전생에 3대의 공덕을 쌓아야 가능하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. 조직에 들어온 사람은 누구나 상사에게 맞추려고 노력한다. 직장생활 좀 한 사람 중에 상사에게 맞추려고 노력 안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? 상사의 표정과 심기 살피는 것은 기본이고, 점심 저녁 같이 먹어주고 술 먹어주고, 주말에 같이 골프에 등산에, 명절이면 남 모르게 와인이나 소고기 한짝 보내고, 나름 맞추려고 최선을 다 한다. 영혼을 살짝 넣어서.

문제는 본인이 이렇게 노력을 했음에도 잘 안맞았을 때이다.
보고할 때마다 맘에 안든다고 지적하고, 하는 일 족족 딴지걸고, 다들 보는데 창피주고 하면 정말 괴롭다. 밤에 잠이 안온다. 새벽에 뒤척이고 회사 가기가 싫다. (애들 학원비 때문에 결국 간다.)
잘 안맞는 상사 때문에 정신과 상담은 물론이고 퇴사, 심하게는 자살까지 하는 경우를 봤다.

만약 본인이 이런 상황이라면, 이런 상황이 예견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?
필자 생각은 ‘피해야 한다.’이다.
다 버리고 다른 팀, 다른 조직으로 옮기는 것도 좋고 육아 휴직, 병가 등도 좋고 정 안되면 이직도 고려해 볼 만하다.

옛날 왕이 불렀는데 병이 났다는 이유로 시골에 묻혀 출사를 안 했다거나, 병이 났다는 이유로 조정에서 물러났다거나 하는 것은 왕(CEO)에게 얘기해봤자 의견이 안 받아들여질 것을 알고 혹은 왕(CEO) 옆에 있으면 본인에게 장기적으는 ‘화’가 미칠 것을 염려해서 일부러 피한 것이라고 생각한다. 아주 지혜로운 것이다.


서로 좋아서 결혼 했고 한 이불 덮으며 아이까지 있는 부부도 안 맞으면 헤어지는데, 내가 노력했음에도 안 맞는 상사와 안 헤어질 이유가 없다. 내가 최선을 다했는데도 도저히 맞출 수 없다고 생각된다면, 더 이상 괴로워 하지 마시고 내쪽에서 먼저 쿨하게 피하길 권한다. 소나기는 피하는 것, 그것이 정신건강에 훨씬 좋다.

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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